19세기 후반, 조선은 세계 질서의 거센 변화를 온몸으로 맞이하던 시기였습니다. 서양 열강은 제국주의를 내세워 아시아 각국을 잠식해 나갔고, 조선 또한 전통과 개혁의 기로에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유교적 가치와 질서를 지키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문명과 기술을 받아들이려는 개화 사상이 확산되었죠. 이처럼 격동의 시대 속에서 조선은 비로소 ‘근대 기술’이라는 낯선 존재를 마주하게 됩니다.
오늘은 조선 말기, 즉 개화기 시절에 어떻게 전기와 전화가 한반도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어떤 사회적 의미를 가졌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당연하게 사용하는 전등과 전화기의 시작이 바로 이 시기에 있었다는 사실은 많은 분들에게 놀라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경복궁의 첫 불빛 — 조선에 전기가 들어오다
당시 고종 황제는 경복궁을 새롭게 단장하는 과정에서 전등을 설치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조선 정부는 미국에서 기술자를 초청했는데, 바로 찰스 헤스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지도로 궁궐 안에는 작은 발전소가 세워졌고,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전기가 처음으로 불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조선 역사상 ‘첫 불빛’의 현장이었죠.
이 사건은 단순히 기술의 도입을 넘어, 조선이 근대 세계와 손을 맞잡으려 한 중요한 상징이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에게는 전기가 여전히 낯설고 먼 존재였지만, 왕실과 정부는 이를 통해 ‘문명국가로의 전환’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왕실과 상류층의 공간에 한정된 전기 사용이 점차 확대되며, 1900년대 초부터는 민간 전기회사가 등장하게 됩니다. 1905년 설립된 한성전기회사는 전차 운행과 전등 공급을 맡으며, 조선의 도시 풍경을 바꿔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전기의 도입은 곧 도시 생활의 새로운 국면을 의미했습니다. 이전에는 해가 지면 모든 활동이 멈췄지만, 전등이 들어오면서 야간에도 상점이 운영되고, 문화·교육 활동이 가능해졌습니다. 조선의 밤이 처음으로 ‘빛’을 가지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왕의 목소리가 전선을 타고 — 전화기의 등장
고종 황제는 직접 전화기를 사용해 경복궁과 덕수궁 사이의 통화를 시연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조선이 새로운 통신 기술을 실험적으로 수용한 역사적 사건으로,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국가 운영 효율화를 위한 시도였습니다. 당시 전화기는 주로 왕실과 정부 부처 간의 연락용으로만 쓰였고, 민간에는 보급되지 않았습니다.
전화 기술은 일본과 미국을 통해 들어왔습니다. 특히 일본은 조선의 통신 인프라를 장악하면서 이를 정치적·군사적으로 이용하려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내부에서는 전보와 전화의 편리함을 인식하고, 이를 적극 활용하려는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정부기관 간 업무 연락이 빨라지고, 지방과 중앙의 명령 전달 속도도 크게 단축되었습니다.
당시 전화는 고가의 장비였고, 설치할 수 있는 인프라도 제한적이었습니다. 따라서 백성 대부분은 전화기의 존재를 직접 볼 기회조차 없었지만, 상류층과 관료 사회에서는 이를 근대 문명의 상징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이 무렵 전보망이 확충되면서, 주요 도시 간의 소식이 빠르게 전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문 발행 주기가 짧아지고 상업 거래가 신속해지는 등, 전화와 전보는 조선 경제의 근대화를 촉진하는 촉매 역할을 하게 됩니다.
전기와 전화가 바꾼 도시의 일상
전기가 들어오면서 조선의 도시는 ‘밤에도 깨어 있는 공간’으로 변모했습니다. 상점들은 더 오래 영업할 수 있었고, 극장이나 다방 같은 새로운 문화 공간이 등장했습니다. 거리의 불빛은 근대 도시의 상징이 되었으며, 조선 사람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 리듬에 적응해 나갔습니다.
전화는 사회의 소통 구조를 변화시켰습니다. 행정 부처 간 신속한 의사 전달이 가능해졌고, 상인들은 직접 만나지 않아도 주문과 협상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상업 네트워크를 강화시키고, 도시 경제의 활성화를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근대 기술의 확산은 사회적 격차를 심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전기와 전화는 대부분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지방 농촌 지역은 여전히 전통적 생활 방식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 정보 접근성, 교육 기회, 경제 활동에서 도시와 시골의 격차가 점점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는 훗날 한국 사회가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게 됩니다.
조선의 근대화 시도와 그 역사적 의의
고종과 개화파 인사들은 기술이 곧 국력이라는 사실을 일찍이 인식했습니다. 그들은 전기, 전화, 철도, 우편, 근대식 학교 제도, 신문 발행 등을 통해 조선을 문명국가의 반열에 올려놓고자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기술 수입이 아닌, 조선이 세계 체제 속에서 스스로 변화를 모색한 자주적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내정 간섭, 그리고 국내 보수 세력의 반발로 인해 이러한 개화 정책은 끝내 완전한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결국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했지만,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해방 이후 산업화와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조선 말기의 전기와 전화 도입은 단순한 기술 수용이 아닌, ‘미래로 나아가려는 결단’이었습니다. 고종이 처음 켠 전등의 불빛, 그리고 덕수궁과 경복궁을 잇던 전화선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첨단 기술 문명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에서의 ‘첫 시도’는 언제나 위대합니다. 조선이 맞이한 근대의 빛은 꺼지지 않고, 시대를 넘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