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1930년대 경성, 변화와 충돌이 공존하던 도시

by may522 2025. 11. 20.

1930년대의 경성, 오늘날의 서울은 식민지 현실 속에서도 빠르게 현대화된 모습으로 재편되고 있었습니다. 일본 제국은 근대화를 빌미로 도로를 정비하고 전차 노선을 확장하며, 백화점·극장·카페 같은 신식 시설을 도입해 경성을 당시 동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도시로 변모시키려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도시의 풍경뿐 아니라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생활패턴까지 크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특히 이 시기 등장한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변화의 중심에 놓인 세대였습니다. 그들은 새로 들어온 서구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당시의 청년층이 느꼈던 갈망과 불안을 동시에 보여주는 인물들이었습니다. 화려한 도시문화의 주체였지만, 식민지라는 구조적 억압 아래에서 모순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는 점이 이들을 더욱 복잡한 존재로 만듭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경성이라는 도시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다른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1930년대 경성, 변화와 충돌이 공존하던 도시
1930년대 경성, 변화와 충돌이 공존하던 도시

모던보이와 모던걸, 새로운 세대의 탄생

1920년대 말부터 부각되기 시작한 모던보이·모던걸은 전통적 규범에서 벗어나 도시의 새로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젊은 층이었습니다. 외모와 행동, 취향에서 이전 세대와 분명한 차이를 보였기 때문에 신문과 잡지에서도 자주 회자되었고, 대중문화의 주요 화제로 떠올랐습니다.

모던보이는 깔끔하게 차려입은 양복, 중절모, 손에 든 담배, 다방과 극장을 자유로이 오가는 세련된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일본어와 영어 등 외국어에 능숙하며, 문학·언론·예술 분야에서 활동한 이들이 많아 도시 지식인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일본 유학 경험이 있거나, 새로운 사조를 빠르게 받아들이는 청년들은 더욱 모던보이에 가까운 인물로 인식되었습니다.

반면에 모던걸은 단발머리와 서구식 드레스, 하이힐을 즐겨 착용하면서 전통적 여성상과 뚜렷한 선을 그었습니다. 백화점과 다방, 카페 같은 도시적 공간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여성들은 ‘신여성’이라는 표현과 함께 큰 사회적 관심을 끌었고, 자유로운 연애관과 자기표현을 중시하는 가치관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상징하는 변화는 단순한 스타일의 차이가 아니라, 개인의 욕망과 자율성이 부상하던 시기적 흐름 속에서 나타난 새로운 사회적 존재였습니다. 그만큼 이들에 대한 대중의 시선은 찬사와 비난이 공존했습니다.

경성의 도시공간이 만들어낸 새로운 일상

모던보이·모던걸의 등장은 도시 공간의 급격한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1930년대 경성은 짧은 기간 동안 대규모 도시 인프라가 구축되면서 근대적 도시로 자리 잡았습니다. 전차와 철도가 생활권을 확장시키고, 넓어진 도로와 신식 상업시설은 사람들의 이동과 소비 방식을 바꿨습니다.

특히 경성역, 본정통(지금의 명동), 종로, 남대문시장 일대는 당시 신문물의 중심지였습니다. 영화관과 백화점, 양식당, 다방 등이 한곳에 모여 새로운 문화를 소비하고 경험할 수 있는 ‘복합 공간’이 형성되었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상업구역이 아니라, 당시 청년들이 근대적 감각을 체험하고 자신만의 취향을 형성해 나가는 무대였습니다.

백화점의 역할 또한 매우 컸습니다. 미쓰코시 백화점 같은 대형 상업공간은 상품 판매는 물론, 전시회·연주회·문화행사를 함께 열어 시민들이 서구식 문화를 가까이 접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없던 문화적 자극은 도시 청년들에게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와 함께 카페·다방은 모던 세대의 대표적 아지트였습니다. 커피를 마시고 재즈를 듣고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나누는 풍경은 당시로서는 매우 도전적인 문화였고, 이 공간은 개인의 취향과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중요한 무대가 되었습니다.

화려함 뒤에 숨은 식민지 현실

겉으로 보기엔 자유롭고 세련된 모습이었지만, 이 세대가 마주한 식민지 현실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경성의 근대화는 일본 제국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추진된 측면이 강했고, 도시의 번화함 이면에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통제가 깊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모던보이·모던걸 역시 이 구조적 제약 안에 놓여 있었습니다. 새로운 문물을 소비하고 현대적 감각을 받아들였지만, 그 속에는 ‘조선인으로서의 한계’가 명확히 존재했습니다. 자유롭고 개성 있는 삶을 추구할수록, 식민지 체제의 벽과 정체성의 혼란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는 모순적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특히 문학·예술 분야의 청년들은 이러한 갈등을 작품에 담아냈습니다. 이상, 염상섭 등 당대 작가들은 도시의 화려함 속에서 소외감과 불안을 느끼는 식민지 청년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했습니다. 모던 경성은 그들에게 새로운 감각의 공간이자, 동시에 근대적 고독이 깊어지는 장소였습니다.

한편 모던걸은 자유로운 행보로 인해 더욱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일부 언론에서는 모던걸을 ‘퇴폐적’ ‘전통을 버린 여성’으로 묘사하며 사회적 경계를 강화했습니다. 당시 여성에게 허용된 행동의 폭이 좁았던 만큼, 모던걸은 더욱 강한 시선과 규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경성 모던문화가 남긴 흔적

모던보이·모던걸의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 유행이나 패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들은 한국 사회가 근대적 개인과 도시문화를 처음으로 경험하던 시기에 등장한 세대로, 시대적 변화가 한 사람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당시의 문화와 공간을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다시 조명하고 있습니다. 드라마·영화는 물론이고, 전시나 복고 트렌드 속에서도 1930년대 경성의 감성을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그 시대의 고민 속에서 지금을 비추는 작업’으로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자유와 억압의 경계,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규율 사이의 갈등은 지금의 도시에서도 여전히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던보이·모던걸이 남긴 흔적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작지 않은 의미를 던집니다. 식민지라는 극단적 조건 속에서도 새로운 삶을 모색했던 그들의 경험은, 한국 현대도시문화의 밑바탕에 남아 지금도 조용히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